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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사리훈독가정교회Sangsa… 작성일21-04-07 00:00 조회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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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총재 자서전 | 文鮮明総裁自叙伝 | 나의 아내 한학자 | 참부모님 | 가정연합 | 하늘부모님 성회 | 통일교 | Rev.M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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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집안 배경
문선명 총재는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남평 문씨 집안에서 문용명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6남 7녀 중 2남으로 태어났으며, 형 문용수의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종조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문윤국 목사로 3.1 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1][2][3] 그 이후로도 문윤국 목사는 피신을 다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집안재산을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어 가계가 파산하였다.[4]

서울 및 일본에서의 유학생활
1938년에는 서울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다니며, 조선예수교회[5] 계열의 명수대예배당[6]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 당시, 창경원이나 흑석동, 상도동 일대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7]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유학하고, 한인학생회를 통하여 항일운동에도 가담했다.[8]

1940년대 남한에서의 활동
졸업 후 귀국한 그는 1943년 12월 최선길[9]과 약혼하였고, 1944년 5월 이호빈 목사의 주례하에 결혼하였다. 1944년 3월에는 서울에 있는 가시마구미 경성지점 전기부에 취직하였고, 1944년 10월에서 1945년 2월 사이에는 경기도경찰부에서 감옥생활을 하며 일본에서의 활동에 대한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1945년 10월에는 금전 문제 때문에 1주일 가량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1946년 4월까지 김백문 목사의 '이스라엘수도원'[10][11]에 참여한다. 이곳에서 김백문은 계시에 의하여 모든 신자가 보는 앞에서, 전 세계의 솔로몬왕의 영광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을 축복해 주었다고 한다.[12]

북한에서의 활동
1946년에는 가족들을 남한에 남겨둔 채 홀로 월북하여 평양으로 떠나게 된다. 1946년 6월에는 당시 북한 정부(북조선인민위원회)의 신종교에 대한 탄압정책에 따라서, 종교를 사칭해 사기를 쳤다는 명목으로 허호빈이 적발되었다. 문선명 총재는 허호빈과 관련이 있다는 죄목으로 조사를 받았으며, 남한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간첩혐의가 덧붙여졌다.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뚜렷한 혐의가 나타나지 않아서, 사회질서문란죄로 1946년 8월부터 11월까지 수감되었다. 출옥 후 종교활동을 통하여 신도 수가 점차적으로 많아졌으나, 북한의 종교탄압으로 인하여 다시금 간첩 혐의로 1948년 2월부터 5월까지 평양내무서 및 형무소에 수감된다. 5월에는 흥남노무자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 1950년 10월까지 강제노역을 당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흥남에 상륙한 유엔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10일간의 평양 귀환 길에 문정빈, 박정화 등 옥중에서 전도한 네 명의 제자가 따라나섰다. 평양에서 다시 40일간 지승도, 옥세현, 정달옥, 김원필 네 명의 제자를 수습하여 평양을 떠난다.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떠나, 27일에 서울에 도착한다.[13][14].

1991년 11월 30일 김일성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 문선명 총재 내외를 초청해 북한에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였다.

1950년대 남한에서의 활동
서울에 1주일 간 체류 후, 1951년 부산광역시로 피난하여 자신의 교리인 《원리원본》을 집필하여 1952년 완성하면서 부산과 대구광역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한다. 지승도, 옥세현, 김원필, 이기완, 강현실 등이 초기의 신자였다.[15] 1953년에는 대구로 개척 전도를 하며 세력 기반을 넓혀 나갔다.

1954년 5월 서울로 기반을 옮기며 공식적으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를 창설하였다.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벌이다, 1955년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믿는 이대 연대 학생 및 교수들에게 퇴학 및 퇴직 명령이 내려지면서 기반이 약화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한국전쟁 당시 병역기피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10월에 혐의에 대한 무죄판결이 나고, 문선명 총재는 100일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친다. 그의 아내 최선길은 수감기간 동안 문선명 총재와 신흥 종교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 대한 비난을 공공연히 하였으며, 교도소에 이혼장을 들고 찾아와서 이혼을 종용하였고, 결국 이혼하였다. 같은 시기, 용산구 청파동으로 본부를 옮기고 정착한다.

1957년 교리서 《원리해설》(1966년 《원리강론(原理講論)》으로 증보되었음)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종교활동을 시작하면서, 1958년에 일본(최봉춘), 1959년에 미국(김영운, 김상철)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초창기부터 해외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59년 청파동에 통일산업 공장을 세우며, 경제사업을 시작한다.

1960년대 남한에서의 활동
1960년부터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라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다. 1960년에는 문선명, 한학자 총재의 성혼식과 3쌍의 초대교인들이 참가한 축복결혼식이 열렸다.[16] 1961년에 33쌍이 더 축복결혼에 참여함으로써, 총 36쌍이 탄생하였다.[17] 같은 해, 장녀 문예진과 장남 문효진이 탄생하였다.[18]

1963년에 72쌍의 축복결혼식이 있었으며, 1964년에는 차녀 문혜진이 태어났으나 1주일 만에 사망하였다.[출처 필요][19] 1965년에는 세계 40개국을 순방하며 120개의 성지를 지정하였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동하였다.[출처 필요] 1966년에는 종교간의 화합을 내건 '초교파운동본부'를 설립하였다.[20] 1968년 1월 1일에는 하나님의 날을 선포하였으며[출처 필요], 같은 해에,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하여 승공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그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에 반대한다’거나 ‘공산주의를 박멸한다’는 뜻의 ‘반공’(反共) 또는 ‘멸공(滅共)’보다는, 공산주의를 이기자는 뜻의 ‘승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21] 또한, 이 해 2월 22일에 430가정 축복식이 있었다.[22]

1970년대 미국에서의 활동
1970년 9월에는 세계반공연맹 일본대회를 개최하였다.[23] 1971년에는 기반을 미국으로 옮긴다.[24]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때에는 닉슨 대통령을 지지한다. [25] 문선명은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내어, 「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Forgive, Love and Unite)」라는 구호하에 닉슨을 옹호하였다.[26] 1974년과 1975년에는 미국 국회에서 초청하여 "One Nation under God"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27] 1976년에는 워싱턴 마뉴먼트와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집회를 하였다. 워싱턴 마뉴먼트 집회에는 30만 명의 인파가 몰렸으며, 그는 "퇴폐적인 미국 청년들을 위기에서 구해내어 희망의 젊은이로 만들려 미국에 왔다."고 말하였다. 그해 연말 뉴스위크는 그를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였다.[28] 1977년 2월 23일 자신의 생일에는 미국 벨베디아 수련소에서 이 세상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망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하는 자가 망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주장한다.[29] 1978년에는 뉴욕의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제1회 세계언론인대회를 개최한다.[30] [31]

1980년대 미국에서의 활동
1970년대의 미국에서의 선교로 기독교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기독교 세력 등의 반발이 거세어졌고, 유대인들까지 적대시하였다. 결국 그는 관습에 따른 선교헌금에 대한 이자소득의 세금을 신고하지 않아, 1984년 7월 20일, 미국의 댄버리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에 많은 종교인들의 반대운동이 벌어졌다.[32] 이후 문선명 총재는 모범수로 감형을 받아 13개월 만에 출감했다.[33]

21세기 동향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일대에 1995년부터 천주청평수련원 (현 HJ천주천보수련원)[47], 청심국제병원[48], 천정궁박물관[49] 를 세운 데 이어, 200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화교육기관인 청심국제중학교·청심국제고등학교[50] 설립하는 한편, 2012년 무렵에는 여수세계박람회를 유치하기 위한 정부의 기업도시 건설 계획에 참여하여,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일대에 대규모 부지의 매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51] 현재는 여수엑스포 유치에 큰 도움을 준 여수 화양지구 해양관광 레저단지 개발이 문선명 총재의 계획하에 (주)일상해양산업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다.

2008년 7월 19일, 서울 서초구 반포에서 회의를 가진 뒤 그와 그의 일가족과 신도들이 탄 전용 헬리콥터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의 청심국제병원 방면으로 귀환하던 중 악천후 속에 헬기가 장락산 정상 부근에 추락,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문선명총재의 일가족을 비롯하여 승무원까지 탑승자 전원이 무사히 대피했고, 그 후 헬기는 폭발하여 전소되었다. 승무원을 포함한 총 16명의 탑승자는 모두 무사하며 중경상을 입은 3명을 제외한 문선명 총재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들은 경미한 상해만 입고 전원이 청심국제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52]

2010년 1월 31일은 문선명 총재의 구순이었다. 이 날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한승수 등이 축하하였다. 특히 김정일은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을 통하여, 산삼 세 뿌리와 함께 축하의 글을 자수로 새긴 리본, 장미 90송이와 백합 90송이를 담은 화병과 화환 등을 보내왔다. [53] 2009년 3월 김영사를 통해 문선명 총재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54] 이 출간되었다.

2012년에도 7월 19일 피스컵 개회선언을 하였고[55] 8월 2일 모교인 오산고등학교를 방문[56]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8월 13일 감기와 폐렴 합병증으로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 병세 호전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아 같은 달 31일 경기도 가평군 청심국제병원으로 옮겨졌으며, 2012년 9월 3일 그 곳에서 향년 93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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